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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2023

하나님의 사람을 무너지게 하는 것 1 "치유받지 못한 열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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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로 보기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 사람으로 등장한 솔로몬, 그는 어떻게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국가의 분열을 가져오는 오명을 갖게되었을까?    그 첫번째 몰락의 길은 '무리한 토목공사와 막중한 세금 부과'였다.    20년간 성전과 자신의 왕궁, 병거성을 지었는데 7년은 성전, 13년은 자신을 위한 공사에 국가 에너지를 쏟았다. 주목할 점은 성전은 아버지 다윗왕이 준비한 물질과 재료로 드려졌지만 다른 건축물은 국민의 세금으로, 심지어 이방 왕에게 국토를 팔아넘기며 마련한 돈으로 공사한 것이었다. (왕상9)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국민에게 거둬드린 세금은 1년에 666달란트에 달하는 금 (한화 10조가 넘는 돈) 이었다.(왕상10)  이스라엘이 한국의 강원도 면적과 비슷한 점을 생각한다면 과중한 세금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솔로몬 사후에 반란으로 인해 나라는 남북으로 쪼개지게 된다.   솔로몬의 금 보좌   결국 백성을 섬기기 위해 지혜를 구했던 그는 어느 순간 백성위에 군림하여 착취하는 왕이 되어있었다.    솔로몬은 왜 이리 건축에 집착했을까? 특히 평화의 시대에 쓸데없는 병거와 병거성을 보유하여 군사력을 과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 다윗왕이 전쟁에 능한 왕으로 칭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그릇과 모양대로 살면 행복하지 않은가싶다. 다윗은 전쟁에 능한 왕으로 부르심 받았고 솔로몬은 지혜로 백성을 섬기는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어도 부르심이 달라 지을 수 없었고 솔로몬은 전쟁을 하고싶어도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적인 복을 누렸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매일 매일 감사하며 살면 비교의식과 열등감에서 나오는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히지 않게될 것이다. 

룻기 -5- 작은 만남속에 위대한 축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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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을 알아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룻기 2장부터는 절망에서 회복의 국면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그 회복의 시작은 우연으로 보이는 만남부터 시작입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인생을 어떻게 축복하시는가? 바로 만남을 통해서입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오자마자 만난 사람이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친족입니다. 죽은 엘레멜렉을 대신하여 대를 이어줄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무나 만난게 아닙니다. 딱 그사람을 대기하셨다는 겁니다. 게다가 그는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룻을 살리고 건지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남으로 삶을 복주십니다. 안타깝게도 이를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방여인 룻은 이것을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믿은지 얼마되지도 않은 그녀가 말입니다. 이것이 다시 은혜입니다!  마침! 지나가던 보아스를 마주친 룻, 일이 풀려가기 시작합니다.  '우연히' , '마침' 이라는 단어를 유의하십시오.  사람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계획하신 일이시라는 겁니다.  우리는 나오미가 룻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해석은 다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한 충성과 헌신때문에 복을 받는 사람은 룻 자신입니다.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섬기다 보니 어느덧 그 평판이 나를 살리더라는 겁니다.  보아스는 어떻게 이렇게 룻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품는 것일까요?  룻이 아름다워서였을까요?  여기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가 있습니다.  보아스는 이방 여인 '라합'의 아들입니다. 비록 그 유명한 정탐꾼 살몬과 결혼했지만 이방인의 아픔을 간직한 여인입니다. 보아스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입니다. 그러니 룻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것만 아니라, 이방인 여인으로써의 룻의 아픔을 공감하는 바가 컷을 것입니다.  이렇듯, 만남은 단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요 동시에 인생의 시험무대인 것입니다. 

룻기 -3- '헌심'이 아닌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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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마음만 함께하지 않는다 "목사님~ 마음은 항상 교회에 함께 있어요" 그러나 마음만 함께 하는 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헌심'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헌신' 이라는 단어만 있습니다. (김병삼 목사님, 만나교회)  오르바는 마음으로 눈물흘리고 나오미에게 입을 맞춥니다. 그러나 몸은 옛 삶으로 돌아갑니다. 반면 룻은 결단하고 나오미를 뒤따릅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것이 참 신앙고백입니다. 조건이 되고 이유가 충분해서 헌신하는게 아니라, 마음을 정했기 때문에 몸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머니께 헌신했기 때문에 어머니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헌신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 헌신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를 '예수님'으로 바꿔보면 본문이 새롭게 와닿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 예수님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예수님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 예수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교회 사람들이 인격이 좋아서, 나를 좋아해줘서 나도 좋아해주는게 아닙니다. 내가 제일로 사랑하는 예수님이 사랑하시기에 나도 사랑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교회를, 예수님이 사랑하신 지체들을 나도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룻기-2- 인생이 좋아질 수 밖에 없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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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곡은 있지만 반드시 성장하는 삶의 원칙 인생이 바뀌기 원한다면 자신의 바램과 같은 '선택'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과 다른 선택을 합니다.   "믿음이 자라기 원해요." 하면서 예배에 나가지 않습니다.  "건강해지기 원해요." 하면서 건강에 나쁜 음식을 먹습니다.  "더 많은 일을 이루기 원해요." 하면서 새벽을 허비합니다.  나오미가 절망스러운 삶으로 빠져든 것은 나쁜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거기에 불가항력적인 환경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들들의 요절) 그러나 꼬였던 그녀의 인생이 축복으로 바뀐 것도 또다시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사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룻 1:6)  그녀는 좋은 소식(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있던 곳에서 일어나서 돌아오려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방향을 가른 좋은 선택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간 것은 나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시 좋은 선택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 고백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향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죄를 지었다' 하지만 U턴 하지는 않습니다. 방향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서도 복의 길에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압여인 룻의 선택이 돋보입니다. 세상 좋은 길 버리고 시어머니 따라 하나님을 택한 것입니다.  '붙좇았더라...' 붙잡고 늘어졌다는 것입니다.  비록 육으로 시작했어도 영으로 발전하는 교제는 귀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발전하는 교제는 안타까운 것입니다.  좋은 믿음의 관계는 붙잡고 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유익하지 않고 죄짓게 만드는 관계는 끊거나 멀리해야 합니다.  이러한 소소한

룻기-1- 인생의 흉년, 선택을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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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이 모여 인생을 만듭니다 룻기를 시작합니다.    룻기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물들이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지만 말씀은 없습니다. 오직 사람들의 결정과 만남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 있습니다. 그럼에도 회복의 은혜가 넘칩니다. 이것이 룻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보이지 않더라도 일상의 선택과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선택과 만남을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엘리멜렉은 그 이름을 볼때 경건한 가정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왕')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이고 베들레헴은 '떡집'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생명의 떡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자 그들은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땅으로 이주합니다.    '인생의 흉년', 이 때가 항상 경계해야 하는 때입니다. 경제의 흉년이 있고, 부부생활의 흉년이 있습니다. 학업의 흉년이 있고 건강의 흉년이 옵니다.  자녀양육의 흉년이 있습니다. 이때 내리는 결정을 유의해야 합니다.   엘리멜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아픔은 간과할 수 없어 약속의 땅을 떠납니다. 출애굽때 하나님께 저주받은 모압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아들들을 위해 모압 며느리를 맞습니다. 악수의 연속입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남자 가장 세사람이 모두 죽고 세 과부들만 남게된 것입니다. 살고자 간 땅에서 더욱 참혹한 결과를 마주합니다.    살고자 한 결정때문에 더욱 비참해 졌습니다. 작은 타협은 큰 타협을 가져왔고, 악수를 두니 더 큰 악수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괴로움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 인생과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나오미를 건지셨고 결국은 웃게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은 결말이 중요합니다. 지금 벼랑끝에 달린 기분이시더라도 한가지만 결단하시면 됩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시는 겁니다.

삼손, 일생 딱 두 번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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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천명과 싸운 무기로 알려진 당나귀 턱뼈 워낙 기도가 없던 삼손의 생애에 딱 두번의 기도가 기록됩니다.  첫번째는 목마른 상황에서 '물을 먹고 살게 해달라'는 기도였고, (삿15:18) 두번째이자 그의 인생 마지막 기도는 '블레셋과 함께 죽게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삿 16:30)  첫번째 기도의 응답으로 기적으로 솟아나는 샘물을 먹고 살아난 삼손, 그러나 회복시켜주신 건강한 육신으로 다시 죄에 빠지고 드릴라와 사랑에 빠져 죽음으로 향하게 됩니다.  반면 두번째 기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가 살았을때 죽인 블레셋 사람보다 죽어서 죽인 사람이 더 많았더라! 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기도 vs  세상을 향하여 죽고 사명을 위해 살고자 하는 기도의 결과가 이렇게 판이하게 다릅니다.  오늘 나는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사사기15장 #매일샘물 https://youtube.com/live/hT_0f1e8G4U?feature=share

하나님의 나라에 초청받지 못한 사람들 -신명기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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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sembly of God -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1. 고환이 상한자나 음경이 잘린 자      이방신에게 의식을 행하며 맹세한 자들의 의식에 동참한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 실상은 세상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들        *신약적으로: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 2. 사생자 - 근친상간자들 (주석)     짐짓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사람들          *신약적으로: 십자가의 죄용서를 이용하여 짐짓 죄를 짓는 사람들  3. 암몬사람 모압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고 해하려 했던 사람들      *신약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크시다      예수님의 족보에 시아버지와 관계한(사생)  '다말'이 들어갔고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들어가 있으니      예수님을 통한 용서는 우리의 어떤 죄보다 크다. 

아직도 반 컵이 남아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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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어진 물이 보이는가, 아니면 아직도 남은 반컵이 보이는가? 100% 만족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인생에는 부족함 투성일 것이다.  없는 것을 불평할 것인가 남겨진 것으로 감사할 것인가? 감사는 관점의 훈련이다. 

내가 모르는 찬양에도 손을 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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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모르는 찬양이 나올 때에도 열심히 따라 부릅니다. 심지어 일부러 두 손을 들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면 더 잘 배우게 되기 때문이고  두번째, 앞에 서시는 분들에게 마음의 지지를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배우는 사람도 쉽지 않은 순간인데, 그 배 이상으로 새로운 찬양을 인도하는 분들의 마음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럴때 우리가 적극적인 지지를 보인다면 더욱 힘이 나겠지요?      언제부터인가 내가 아는 곡이라서 은혜가 되는때보다 내가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르고 인도하는 곡이라서 은혜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과 함께 공동체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 공동체를 지키는 일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https://youtu.be/vDtb1fdVRYE